가격 차의 이유는 후자가 전자제품 매장에서 전시용으로 쓰였던 이른바 리퍼브 상품(Refurb Product)이기 때문이다.
리퍼브 상품은 고객의 단순변심으로 반품됐거나 전시용으로 사용됐던 물건을 수리하고 재포장한 상품을 말한다.
신상품과 다를 것 없는 성능과 외관에 애프터서비스까지 보장되니 신상품이 부러울 것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리퍼브 상품이 본질적으로 중고(中古)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중고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조)는 ‘이미 사용하였거나 오래됨’ ‘좀 오래되거나 낡은 물건’ ‘그리 오래지 아니한 옛날’ 등이다. 하지만 사전적인 의미 외에도 중고라는 단어의 의미 기저엔 ‘이미 사용해 별 볼 일 없는 하찮은 것’이라는 세간의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어떤 쇼핑몰도 리퍼브 상품을 중고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지 않는다. 리퍼브 상품은 ‘미사용 박스 상품’ ‘A급 상품’ ‘신동품(새 것과 다름없는 중고품을 가리키는 은어)’ 등 신상품보다 더욱 신상품 같은 절묘한 수식어로 소비자에게 다가간다.
이는 중고라는 단어에 깔린 부정적인 인식을 최대한 덜 느끼고 싶은 소비자 심리의 반영이기도 하다. 거래가 성사되려면 판매자와 소비자 모두 기분 좋게 속이고 속아야 한다.
최근 들어 중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실용적인 이미지로 대체되고 있다. 2012년 기준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규모는 1099조원에 달한다. 가처분소득(가계 수입 중 소비와 저축 등으로 소비할 수 있는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무려 155%에 이른다. OECD 평균(136%)뿐만 아니라 일본(132%)이나 미국(120%)보다도 훨씬 높다. 돈을 버는 속도가 빚이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가계부채가 소비위축을 불러일으키고 경기불황과 고물가가 지속됨에 따라 중고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국내 최대 온라인 쇼핑몰 옥션의 올해 상반기 리퍼브 상품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2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스마트폰의 경우 전년 대비 무려 200%나 증가했을 정도로 리퍼브 상품의 인기는 그야말로 상한가다. 온라인 쇼핑몰 G마켓의 올해 상반기 중고품 판매량 역시 전년 동기 대비 22% 늘어났다. 그렇게 중고시장은 새로운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 완충지대를 형성하며 영역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
경기불황의 그림자 건너편에선 조금은 다른 모습의 중고시장이 활황을 이뤄 중고란 말을 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정판 시계ㆍ빈티지 오디오 등은 보관 상태만 좋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상승하는 대표적 품목이다.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프랭크 뮬러ㆍ피아제ㆍ위블로ㆍ블랑팡 등 명품 시계 한정판의 경우 5~10년 뒤 중고가가 원가를 웃도는 일이 벌어져 뉴스 한 구석에 오른다.
90년대 중반 등장한 모토로라 스타텍 휴대폰 공기계는 지금까지도 마니아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중고시장에서 10만~20만원이라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경기침체 속에서도 강세를 유지하던 명품시장에도 소비위축 여파가 번졌지만, 중고 명품시장만큼은 쾌속성장 중이다. 실례로 고이비토ㆍ구구스ㆍ비바노블리 등 중고 명품판매 업체가 입점한 인터넷 쇼핑몰 11번가의 올 상반기 중고 명품 판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80%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고거래는 일견 짝짓기와도 닮아있다. 지난해 90년대 복고 열풍을 불러일으킨 영화 ‘건축학개론’의 카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영화만큼이나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이 감성적인 카피를 뒤집으면 삭막하게도 “지금 함께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첫사랑이 아니다”로 읽힌다.
사소한 과거를 들추는 데 현재를 소비하는 순간, 관계는 무너지게 된다. 치명적인 과거가 없는 한 기분 좋게 덮고 넘어가며 타협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이 같은 관계를 중고거래에 대입해 ‘남들과 먼저 만났지만 인연이 없었던 물건을 내 소중한 인연으로 만들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위’로 읽는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독해방법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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